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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궂은 날이 지나면 맑은 날이 온다

낯설었다. 남가주에 한바탕 내린 폭우도 낯설었고, 쏟아붓듯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운전하는 것도 생소했다. 야트막한 동네 뒷산까지 내린 눈이 그려놓은 산마루가 생경했고,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건물도 설면하기만 했다.     세차게 몰아치던 겨울 폭풍이 잦아들고, 비구름이 물러가면서 맑은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낯섦은 곧 익숙함으로 바뀌었다. 파란 하늘 아래 떠 있는 뭉게구름을 벗 삼은 야자수는 여느 때처럼 하늘거리고, 눈 부신 태양은 남가주에 봄이 다가옴을 알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빗속에서 운전하느라 땅만 보고 달렸는데, 이제는 제법 멀리 보며 운전할 여유도 생겼다. 앞차의 뒤꽁무니에만 머물던 눈에는 어느새 도로 표지판은 물론 머리에 하얗게 눈 모자를 쓴 산등성이도 들어왔다.     ‘맑은 날과 궂은 날에는 이런 차이가 있겠구나.’ 먼 곳을 바라보며 운전하다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차이는 궂은 날은 가까이밖에 볼 수 없고, 맑은 날은 멀리까지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센 비가 내리치는 궂은 날에는 아무리 멀리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다. 운전이라도 할라치면 차선이 잘 보이지 않으니 땅만 보고 조심스럽게 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앞에 차라도 있으면 그 차를 쫓는 게 안전하기에 그 차만 바라보며 달려야 한다. 도로 위에 패인 구멍이나 떨어진 나뭇가지를 피하느라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와는 달리 맑은 날은 멀리 볼 여유를 갖는 날이다. 한참 앞에서 달리는 자동차들은 물론, 주변에 있는 건물이며, 멀리 보이는 풍경과도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날이다. 땅만 바라보고 달릴 때 보이지 않던 행인들과 각종 간판, 손을 흔들며 반기는 꽃과 나무들, 구름 사이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비행기까지 볼 수 있는 여유는 맑은 날이 주는 선물이다.     맑은 날에는 멀리까지 볼 수 있고, 궂은 날에는 가까운 곳만 볼 수 있다는 말은 우리 인생길에도 해당한다. 인생에도 궂은 날이 있다.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질병과 사고를 만날 때,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압도할 때, 걱정 근심에 밤잠을 설칠 때, 원하지 않는 문제에 휘말릴 때, 몸담은 공동체가 갈등에 휩싸일 때,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등 수많은 형편이 먹구름이 되어 우리의 인생을 궂은 날로 만든다.     인생에 궂은 날이 찾아오면 눈앞만 보기에도 급해진다. 멀리 볼 생각은커녕 그저 주어진 일, 눈앞에 닥친 일을 넘어서느라 경황이 없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는 궂은 날만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궂은 날을 만드는 짙은 구름 위에는 맑은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궂은 날이 지나면 반드시 맑은 날이 온다. 남가주에 불어닥친 꽃샘추위만큼이나 시린 인생의 궂은 날을 지나고 있다면, 조금만 참아보자. 먹구름이 걷히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맑은 날이 곧 올 것이다.     궂은 날이라고 꼭 고개를 숙이고 살라는 법은 없다. 맑은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궂은 날에도 멀리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봄이 와야 꽃이 피지만, 인생에서는 꽃을 피우면 언제든 봄이 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궂은 날일지라도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는 이들의 인생에는 먹구름이 걷히고 금세 맑은 날이 찾아올 것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우리 인생길 하늘 아래 부신 태양

2023-03-0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이젠 묻지 않기로 해

“잘 가” 내게 굴레 씌웠던 모든 것들아 나는 뒤돌아 서며 말했다 고개를 드니 별들이 쏟아졌다 밤 하늘 아래 나무들은 깨어 있었다 “이리 와, 내 옆에 앉아” 나무는 잔가지를 흔들며 반겨 주었다 떨림이 깊을수록 따뜻했다 울타리 없는 자유에 눈물을 훔쳤다 사람이 아니어도 위로가 되네 눈을 드니 별들의 하늘, 땅 위 나무들 반짝이며, 온 몸을 흔들며 반겨주는     “잘 지내지?” 지금쯤 잠 들었을 너에게 간다 이젠 묻지 않기로 해 바람에 출렁이는 가지 끝 그 끝에 매달린 위태로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네 속에 내가 남아 있는지 지나는 시간 속에 한번이라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이젠 묻지 않기로 해 오늘은 나에게, 또 너에게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으로 걸어온 텅 빈 언덕에서 홀로 펼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웃는 표정을 잃어버린 수줍음에 시선을 아래로 떨군 자기 소개가 끝나기 전 힐끔 뒤를 돌아본다 꿈이 된 어머니가 손을 흔든다 음악이 흐르고   떨리는 목소리가 리듬을 탄다 “여기 까지야” 이젠 묻지 않기로 해 흐르는 강물을 보면   흘러도 흘러도 제자리인데 저만치 달아나 버린 지금까지     “곧 저물겠지? 무거우니까” 내 마음을 훔쳐간 날 널 담을 수 없을 때는 밤 하늘이지 셀 수 없는 별들을 담고 남은 자리 내 몫이 될 수 있으려나 별 하나로 남겨져 빛나고 싶지만 이젠 묻지 않기로 해 살아가는 이유가 너 라는 것 적극적인 상상력을 부여한 봄 묻어둘 뻔했던 색깔을 되찾은 다른 몸짓과 소리로   널 기억 한다는 것 아직은 기다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지개를 펴는 그대의 봄 함께 바라보고 싶은 그대의 봄   밤 하늘, 먼 발치로 깊어만 가는       이른 아침. 출근길로 바쁜 차량을 뒤로 하고 Hogan Park에 차를 대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걸 보니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나 보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띄였다. 멀리 던진 공을 달려가 입에 물고 되돌아 오는 개들은 주인보다 행복해 보였다. 넓고 길게 펼쳐진 잔디를 지나 숲길로 접어 들었다. 물 소리가 들려 옆을 보니 강이 흐른다. 이곳에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 리 없던 터라 반가운 마음으로 강 기슭 가까이 내려갔다. 잔 물결을 지으며 강은 반짝이며 흐르고 나는 그곳에 오래 서 있었다. 온통 낙서로 덮힌 다리 난간을 지나 한동안 더 깊이 들어간다. 운동복을 입은 청년이 내 옆을 지나쳐 뛰어가고 얼마 가지 않아 노부부가 나에게 “Good morning!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점점 소란함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청년의 푸른 꿈을 안고 시카고에 온 지도 어언 40년을 지나고 있다. 진정 내 삶을 사랑했던가? 강산이 4번 바뀌면 세상을 알아볼 수도 없을 텐데 로렌스길도 포스터길도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바뀐 건 세월의 무게를 떨치지 못한 나 그리고 너 뿐이다. 그저 왜냐고 묻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내 마음을 훔쳐간 모든 것들을 바라볼 뿐, 아직 늦지 않았어요 고개를 들어요. 하늘엔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먼 발치로 깊어만 가는 밤이 깨어 날 지켜보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아모르 파티 하늘 아래 good morning

202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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